장인성/ 객원 논설위원

장인성/객원논설위원
칭기즈 칸의 제국 몽골은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도 무엇이 부족했던지 1232년 벽두에 아시아대륙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고려마저 손아귀에 넣으려 침공해왔다.

그러나 때마침 몰아친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갔다가 봄이 되자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낌새를 눈치 챈 고려조정에서는 장기적인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도로 천도하자는 주장과 치욕을 겪더라도 몽골과 화친하자는 주장으로 나뉘어 설전만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자 당시 무신정권의 최고 실권자인 최이(崔怡)가 강화천도를 결심하고 화친파를 제거한 뒤 스스로 가솔과 사병을 거느린 채 제일 먼저 강화로 들어왔다.

무인집단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명색만 황제였던 고종(高宗)은 최이를 따라가는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침내 1232년 7월 7일, 도성인 송도(松都-개성)를 떠나 개풍군 승천부에서 배를 타고 직선으로 1km밖에 되지 않는 물길을 헤쳐 강화도 승천포에 닿았다. 강화가 고려의 황도(皇都)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왕이 송도를 떠나기 며칠 전부터 줄기차게 쏟아지던 장맛비는 기세를 더해만 갔다. 그렇지 않아도 갯벌과 진흙으로 메워진 강화도는 천지가 진창으로 변해 발을 옮기는 대로 빠지고 달라붙어 걸음조차 떼어놓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있었다.

‘왕이 강화로 이어(移御)할 때 10여일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진창이 무릎까지 빠지므로 사람과 말이 꼼짝을 못하고 버둥대다가 쓰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비록 높은 신분이라 할지라도 신발도 없이 맨발로 짐을 져야 했고, 부녀자들은 비에 흠씬 젖은 옷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 맨가슴을 드러내는 민망한 경우가 허다했다. 또한 과부이거나 남편이 군영에 차출되어 홀로된 여인들은 그나마 의지할 곳에 없는 서러움에 울고불고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한 아비규환의 와중에서 수레에 깔려죽고 사람에 밟혀죽은 자가 헤아릴 수없이 많았다.

이것이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는 1232년 7월 7일의 승천포에서 벌어졌던 광경이다. 최근에야 그 아수라의 현장에 800년 전의 고려천도를 기리는 조형물을 건립하고 강화천도기념공원을 조성해 놓았지만 그날의 참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세계 최강이었던 몽골에 맞서 39년이라는 긴 세월을 결사항쟁하며 사직을 보전한 고려인들의 호국의지를 되새기는 장이 되었으면 한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강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