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성/객원 논설위원(시인)

1. 강화평야 

개땅쇠라는 말이 있다.
전라도 사람들이 자신들의 끈질긴 근성을 내세우는 데 이용되고 있지만 원래는 남도의 갯벌지대인 보성 벌교 순천 등 해안가 사람들이 개땅(갯벌을 메운 간척지)을 일궈 농사를 짓는 억척스러운 모습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갯벌을 농지로 간척한 개땅쇠의 역사가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 강화도이다. 1232년 6월, 당시 세계최강인 몽골군의 침략을 당한 고려조정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겼다. 몽골과의 결사항쟁을 이어가기 위한 배수진이었다.
그때 조정을 따라온 백성이 약 15만 명이고 관료와 군병을 합쳐 20만 가까운 인구가 강화로 밀려들어왔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도 초기에는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을 풀어 그 많은 이주민을 먹여 살릴 수 있었고, 길어야 한 철만 버티면 몽골군이 물러갈 것이라는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몽골군은 장장 40년 가까이를 이 땅에 눌러앉아 갖은 패악질로 전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마침내는 전시수도인 강화도를 함락하기 위해 압박강도를 높여갔다.
서해를 통해 곡식과 생활물자를 실어 나르던 조운선도 결국은 몽골군의 삼엄한 포위망에 발목이 잡혔다. 당장 식량조달이 끊긴 것이다.
하지만 평야는 찾아볼 수 없고 바다와 바다 사이로 봉긋이 솟아있는 산과 구릉이 전부였던 조그만 섬은 20만이나 되는 엄청난 인구를 먹여 살릴 생산능력이 없었다.
별수 없이 초근목피로 목숨을 잇다가 비상수단으로 갯벌을 메워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지 24년째인 고종 43년(1256)의 『고려사』에 ‘섬 동쪽 해안의 제포와 와포에 둑을 쌓아 좌둔전(左屯田)을 만들고, 이포와 초포 사이에 둑을 쌓아 우둔전(右屯田)을 만들게 했다.’라는 내용이 있다.
천도해 있던 강화도 동쪽 해안에 물둑(堰)을 막고 그 안에 있는 갯벌을 메워 주둔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농지로 삼았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나라 갯벌간척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이후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한 1270년까지 강화도를 비롯하여 교동도와 석모도 등 인근 도서지방까지 확산된 간척사업에 동원되었던 당시 강화백성들의 참상이 어떠했겠는가.

말이 간척이지 산을 들어다 바다를 메우는 일이다. 식량이 떨어진 지 오래이니 굶주림은 극에 달했을 것이 자명하고, 연장이라고 해보았자 괭이나 쇠스랑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마저 닳고 부러져 못쓰게 되면 주변에 나뒹구는 돌덩이를 들어 육중한 산허리를 내리쳐서 깨트릴 밖에 다른 도리가 있을 수 없다.
어느 골짜기로 산허리가 무너져 내릴 때마다 사람이 깔려죽었다는 흉흉한 소문도 메아리처럼 이어졌을 것이고, 혹은 맨손으로 바위를 긁어내다 죽고, 혹은 바위덩이를 등짐으로 지어 나르다 허기져서 죽어갔을 것이다. 그
렇게 인력이 바닥나면 또 다른 백성들이 끌려와 산허리를 떼어다 갯벌을 메운 강화지역의 간척사업은 조선 중엽까지 이어졌다.

외세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국난극복의 피보처(避保處)가 되어주는 강화도의 농지를 넓혀놓아야 비상시에 식량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다를 메우다보니 서너 개로 나뉘었던 섬이 하나로 붙어 오늘의 강화도를 만들었다. 이렇듯 강화평야를 이루고 있는 갯땅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나라를 지켜내겠다는 일념으로 피땀을 쏟아 일궈낸 땅이고, 강화사람들의 투철한 호국정신과 불굴의 투지가 질펀하게 스며있는 거룩한 땅이다.
만약 이러한 강화인들의 개땅정신이 아니었다면 세계의 절반을 정복한 대제국 몽골과 맞서 반세기를 버텨낸 기적은 세계전쟁사(世界戰爭史)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장인성 객원 논설위원(시인. 스토리텔러)

 

 

키워드
#N
저작권자 © 강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