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용남 굿모닝 인천 편집위원)

잠시 외출, 긴 정착… “이젠, 인천이 내고향”

황해도가 고향인 인천시민은 약 36만여 명에 이른다. 인천 인구의 7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상당수다. 대부분 6.25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천에 왔지만, 전쟁의 비참함과 극한의 고통을 이긴 사람들답게 강인하고 철저했다.

그들은 인천에 정착한 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뛰어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꽤 많다. 황해도 사람들의 정서, 문화, 경제활동은 인천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었고, 인천의 역사가 되었다.

잠시 머물기 위해 온 인천은 이제 제2의 고향이 되었다. 65년 전 피란 온 1세대는 대부분 이미 사망했거나 70, 80대의 고령이 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미해병대와 함께 인천 시가전에 나선 국군해병대 2 몸뚱이 하나밖에 없었던 피란민들은 부두 노동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뱃길을 통해 인천으로 피란 온 사람들
인천에 황해도 출신 피란민이 제일 많은 이유는 지리적 접근성 때문이다. 황해도의 남쪽인 옹진, 연백, 해주, 벽성 출신이 제일 많았다. 뱃길은 인천으로 오는 지름길이었다.

그들은 인천으로 바로 오거나 강화도, 연평도 등의 섬을 피란지로 택했다. 피란 시기도 1951년 1.4후퇴 때가 가장 많다. 전쟁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 믿었다. 그들은 바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바닷가 근처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부두를 따라 만석동, 송월동, 화수동, 수도국산 등이 피란민촌을 이루었다. 만석동과 북성동 일대에 있던 천막식 수용소에는 한 천막에 4칸 정도의 쪽방에서 4~5가족이 살았다. 이런 형태의 집 400여 채가 다닥다닥 들어서면서 ‘꼬방동네’를 형성했다.

피란민들은 인천시가 주도하는 도시개발이 진행되면서 남구 용현동, 학익동, 신기촌 등으로 거주 지역을 바꾸었다.

김중미의 소설 ‘괭이부리마을’에는 황해도 피란민들의 삶이 소개되어 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사람들이 고기 잡던 배를 타고 괭이부리말로 피란을 왔다.

전쟁만 끝나면 곧 돌아가려고 피란민들은 바닷가 근처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어도 돌아갈 수가 없었다. 배를 가지고 온 사람들은 인천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살게 되었고, 몸만 달랑 도망쳐 온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미장이나 목수가 되어 부둣가에서 품을 팔았다.

여자들은 아기를 둘러업고 영종도나 덕적도에 가서 굴을 캐고 동중과 바지락도 캐다가 머리에 이고 팔러 다녔다.’

부두 노동자, 노점상으로 생계 이어
맨몸으로 내려온 그들이 인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기술 없고 밑천 없는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원조물자를 실은 미국 화물선이 들어오면 그 물건을 실어 나르는 하역노동자로 날품팔며 살았다.

만석동 만석교회 김흥인 장로(78)는 “피란민 하역노동자들이 배에서 물건을 내리면서 곡식, 쌀, 면화 등의 생필품을 몸속에 숨겨 나오는 경우도 많았다”고 전한다. 다들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에 일어난 슬픈 일화다.

또 그때는 전깃불이 완전히 보급된 상태가 아니어서 대부분의 집들은 호롱불을 켰다. 석유는 미군부대에서 가져다 썼는데 석유에 휘발유가 섞여 있어 불을 붙이는 과정에서 천막촌에 화재가 자주 났다고 전한다. 김 장로의 집에서도 여동생이 호롱불을 키다가 불이 옮아 붙으면서 몸에 경미한 화상을 입었다.

피란민들은 80년대 만석동의 판유리공장이 없어지고 주안염전에 주안5공단이 들어서자, 일터를 쫓아 그들의 원래 정착지를 떠나기 시작했다.

시장은 피란민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공간이었다. 돈벌이가 급했기에 거적을 깔고 나무상자 하나 놓고 노점을 열었다. 과일, 미군 담요, 잠바, 생필품, 미군PX 물건을 팔았다.

특히 용현시장, 송월시장, 배다리 중앙시장은 황해도 피란민이 많았던 곳이다. 중앙시장은 60~80년대까지만 해도 시장 상인의 절반 가량이 황해도 출신이었고, 주요 상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미군들이 입던 군복바지, 담요, 양말, 텐트 등을 깨끗이 빨고 꿰매서 팔거나, 미군PX 물건인 초콜릿, 미제 통조림, 과자, 화장품 등을 시장에 내놓았다. 황해도 사람들은 주로 피복, 양복점, 깡통 장사를 많이 했다. 밑천없이 할 수 있었던 장사들이다.

중앙시장 내 한복상가는 미군부대에서 나온 군용잠바. 바지, 담요 등을 수선해 팔기 시작한 데서 원조를 찾을 수 있다. 수선으로 시작해 기술이 늘자 옷을 만들었고, 한복으로 이어졌다.

군용 담요, 옷 수선이 한복으로 이어져
2007년 ‘인천시 황해도민의 정착과 정체성 형성’이라는 주제로 한국교원대학에서 석사학위 논문을 쓴 김정숙 씨 조사에 의하면 ‘신포시장을 기점으로 한복을 짓거나 중앙시장에서 노점에 재봉틀을 가져다 놓고 미군부대 등에서 나오는 군복을 수선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중앙시장과 양키시장을 따라 줄지어 있는 한복상가의 시작’이라고 적고 있다.

인천제2교회 최승덕 장로(78)는 “백령도, 연평도 등 섬사람들도 중앙시장에서 생활용품을 다 사 갔다”고 말한다. 60~80년대 중앙시장은 전성기였다. 사람들끼리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문전성시였고 황해도 출신 중에는 돈을 많이 번 상인들이 생겨났다.

경제력을 확보한 이들은 시장 상가를 소유하거나 주변의 건물을 매입했고, 서울로 떠난 사람도 꽤 된다. 인천에 상업이 미비하던 시절, 황해도 출신 피란민들의 활약이 컸던 셈이다.

정부는 전쟁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진정된 뒤 피란민들을 위해 가호적을 만들어 주었다. 남자들은 대부분 전쟁에 나가지 않으려고 가호적에 나이를 늘리거나 줄이는 경우가 많았다. 또 땅문서나 집문서를 가져오면 돈으로 융통해주곤 했다고 피란민들은 전한다.

먹을 게 귀했던 피란민들에게 꿀꿀이죽은 귀한 식량이었다. 창영초등학교 주변에 꿀꿀이죽을 파는 가게들이 형성돼 있었다. 미군들이 버린 음식을 가져다 끓인 재활용 음식도 배고픈 시절에는 귀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전파 지역인 황해도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많았다. 피란민들 중에도 교인이 많아 인천에는 황해도 출신들이 세운 교회가 여럿 있다. 송현동 중앙장로교회, 인천중부교회, 용현교회, 만석교회가 대표적이다.

만석교회 마당에 세워져 있는 ‘종’은 황해도 피란민들이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용매도에서 가져왔다. 원래 ‘종’은 깨졌고 똑같은 것을 새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황해도 출신들은 전쟁이라는 엄혹한 상황을 피해 인천으로 잠시 피란 나온 사람들이다. 그들도 잠시의 외출이 긴 정착으로 이어질 줄 몰랐다. 정착은 제2의 고향으로 이어졌다.

인천에 황해도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의 정체성은 인천시의 지역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됐고 황해도 피란민들의 이야기가 결국 인천 역사의 한 부분이 됐다.

인천의 한 축을 형성한 그들의 이야기가 다시 인천이 되어, 인천의 오늘을 말하고 있다.

(글/ 이용남 굿모닝 인천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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