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택 한국납세자연맹 회장

국가는 국민이 납세의무를 이행하는 데 최대한 비용 없이 성실신고 하도록 보장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국가가 군입대하는 병사에게 “총 사가지고 입대하라”고 하는 격의 어처구니없는 세법조항이 있다. ‘강제외부세무조정제도’가 바로 그 조항이다.

소득세나 법인세를 신고할 때 일정규모이상의 수입금액이 있는 경우, 기업회계와 세무회계를 조정하는 세무조정계산서를 첨부해야 한다. 그런데 납세자가 스스로 세무조정계산서를 작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경우에도 세무대리인에게 돈을 주고 도장을 받아 세금신고를 하도록 의무화 하고 이를 어기면 무신고가산세를 부과하고 있다.

지난 8월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69년부터 시행돼온 강제외부세무조정제도의 근거가 되는 소득(법인)세법 시행령이 무효라고 판결했다. 무효사유는 2가지다.
우선 납세자 스스로가 세무 관련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사업체 내부에 전문 인력을 보유하고 있어 외부전문가에게 세무조정계산서의 작성을 맡길 필요가 없는 경우에도 강제하는 것은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전원합의체는 또 세무조정계산서를 외부전문가에게 맡길 것인지 아닐지는 납세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인데, 외부전문가에게 맡기도록 강제하는 것은 계약의 자유 등 행동자유권을 침해한다는 점도 함께 지적했다.

둘째, 이처럼 중대한 내용을 법률이 아닌 시행령에서 규정한 것은 모법의 위임의 범위를 벗어나 무효라는 것이다. 2013년 기준 외부세무조정계산서를 첨부해야 하는 사업자(개인사업자 약 100만 명, 법인 48만개)들이 한 해 동안 부담하는 세무조정료는 1조원이 넘는다.대법원은 이처럼 사업자들에게 큰 부담이 되는 납세협력비용이 불가피한 법률이라면 사전에 이해 관계자들의 비판과 참여가능성이 보장된 공개적 토론과정을 거쳐야 할 필요성이 크다고 판결문에 명시했다.
하지만 기재부는 사법행정상 최고의결기관인 전원합의체의 판결 취지를 무시했다. 무효판결을 받은 시행령과 같은 내용을 그대로 소득(법인)세법에 옮겨 국회에 제출한 것이다.게다가<행정절차법>상 ‘40일 이상’이어야 할 입법예고기간을 주말 포함 단 4일로 축소해 사실상 납세자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았다.

세무사 단체인 한국세무사회 회보 등을 보면 세무사들이 기재부 등의 관료를 대상으로 입법 로비활동을 한 정황이 확인된다. 현 세무사회 회장은 세제실장 출신이다. 로비의 영향 여부를 떠나서, 기재부 등의 관료가 국민이 아닌 특정 자격사들을 위해 위헌적 입법을 강행했다면 더 이상 국민의 피땀인 세금으로 봉급을 줄 이유가 없다.

프랑스나 캐나다 등 대다수 국가들은 세무사자격증 제도가 없고, 세법을 아는 모든 국민이라면 누구나 세무대리 업무를 할 수 있다. 한국처럼 외부세무조정을 법으로 강제한다는 개념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다.

‘강제외부세무조정제도’는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납세자가 세법을 잘 알아 스스로 성실히 자진신고를 하려고 한다. 세무공무원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신고 못 받아요. 나의 선배인 세무사에게 100만원을 주고 도장을 받아와야 신고가 접수됩니다”라고 말한다. 납세자가 그 이유를 묻자 “나도 곧 퇴직해 세무사가 되니, 선배 밥그릇 챙겨주는 것은 곧 내 밥그릇 챙기는 것이기 때문이죠”라고 대답한다.강제 외부세무조정제도는 퇴직세무공무원의 밥그릇을 챙겨주는 제도로,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자진신고를 도와줘야 할 국가가 성실납세를 방해하는 꼴이다.

국회의 중요한 기능은 소수 이익집단의 이득을 견제하고 다수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다. 국회는 대법원판결 취지에 따라 강제외부세무조정제도를 폐지하고 필요한 사람만 세무대리인에게 자율적으로 세무조정을 맡기도록 해야 한다. 국회가 정부법안대로 통과시키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판결가능성이 높아 부실입법의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국민 세금으로 공무원연금적자까지 메워주기에도 벅찬데, 퇴직한 세무공무원들을 위해 추가로 세무조정수수료까지 납세자가 부담해야 할 까닭이 뭔가? 지금 우리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도처에 널려 있는 다수 국민들의 희생으로 소수 기득권의 밥그릇을 챙겨주는 악법들을 철폐하는 것이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강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